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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유허비각 (三賢遺墟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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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문화재 지정 : 경남 문화재 자료 제27호

배 향 인 물 : 변옥란, 변중량, 변계량

창 건 연 도

지 정 일

향 사 일

 

iq02.png 연 혁

신도비는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예조판서를 지낸 변계량의 행적과 그의 아버지인 판서공 휘 옥란과 친형 춘당 휘 중량의 행적을 기록한 변씨 삼현의 유허비로서 춘정의 7대조인 진사공시에 이곳에 입향하여 누대가 관직 또는 문장을 하였고 거유 계량의 출생지이므로 1946년에 후손과 향림에서 그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 하였다.

지정 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제27호로 지정 되었다.

 

iq02.png 변옥란(卞玉蘭)(1322-1395)

고려 충숙왕 9년(임술) 1322년생

관례전 부상을 당하고 복을 벗은 뒤 자당에게 서울가서 벼슬하여 선조의 업을 계승하겠다고 굳이 청하여 갔다.

 

고려조

병술년(1346)에 액정내시백례빈시승

경자년(1360)에 진주 판관

정미년(1367)에 전법 정랑으로 전라도 안렴사

무신년(1368)에 화령소윤

임자년(1372)에 수원부사

을묘년(1375)에 선공판사

병진년(1376)에 내부판사로 옮겼는데 양광도안렴사 신원좌가 공의 포상을 올리게 되어 전농판사로 통헌후봉익으로 승급하여 청주목사

경신년(1380)에 충주목사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을 벗은 뒤

경오년(1390)에 호조판서 곧 병조와 이조판서

 

조선조

임신년(1392) 이태조 즉위 원종공신 호익

계유년(1393)에 검교판중추부원사겸혜민국사

을해(태조4년) 1395년 1월 23일 졸 향년 74세

 

태조께 부음이 이르자 심히 슬퍼하며 공을 실직 중추원사로 임명하려 했더니 하는 수 없구나 하셨다.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공은 천품이 강명하고 마음가짐이 인자하였으며 고향 사람들이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찬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며 모두 업적이 훌륭하였다. 항상 자제를 훈계하기를 임금을 섬기기는 지성으로 해야하고 관직을 맡아서는 부지런해야하며 세도에 아부하고 재물을 모으려는 마음을 갖지 말라 하고 임금에게 충성과 국사를 걱정하는 것을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 묘 장단 임강현 구화리 간좌 밀양 초동면 구령리에 공과 2자 변중량과 변계량의 삼현 유허비에 송준필이 찬하고 서주현이 서하고 성기덕이 전하다.

 

유형문화재 제 39호와 이외 문화재 101~23-055호다.

태조 강헌대왕 실록 2권 44 참조

배1 정경부인창녕성씨 전객령공필녀

군기감정송국손, 호장중윤이보증손, 사간충주지환외손 묘무전

배2 정경부인창녕조씨 승봉랑제위보부사조석녀 묘무전

 

iq02.png 변중량(卞仲良)( ~ 1398)

춘당 변중량(春堂 卞仲良?~1398(태조7))은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검교 판중추원사(劍校 版中樞院事)인 변옥란(卞玉蘭)선생의 아들이며, 춘정 변계량의 형이다.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의 문인으로, 태조 이성계의 백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이다. 193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일파로 몰려 참살되었고 저서로는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

 

iq02.png 변계량(卞季良) (1369-1430)

춘정선생(春亭 1369~1430) 변계량(卞季良)은 자는 거경(巨卿)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검교 판중추원사(劍校 版中樞院事)인 변옥란(卞玉蘭)의 아들이며, 춘당 변중량(卞仲良)의 동생이다.

 

1382년(우왕 8)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다.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典校) ·주부(主簿) ·진덕박사(進德博士)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초 천우위우령(千牛衛右領) 중랑장 겸 전의감승(典醫監丞) 의학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사헌부시사(侍史) ·성균관학정(學正) ·직예문관(直藝文館) ·사재소감(司宰少監) 등을 거쳐, 예문관의 응교(應敎)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 예조우참의(右參議), 1409년 예문관제학(提學), 1417년 대제학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참찬을 역임하고, 1426년(세종 8) 판우군(判右軍) 도총제부사(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10여 년간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태조실록》 편찬,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문묘 ·기자묘 비문과 낙천정기(樂天亭記) ·헌릉지문(獻陵誌文) 등을 찬(撰)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하며, 문집에 《춘정집》이 있다. 경북 청도 봉양서원, 경남 거창(居昌) 병암서원(屛巖書院)에도 배향되었다.

 

iq02.png 변계량 묘지도-(변수남 기록)

변세교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부산대 변희룡교수가 이 영인하여 제공한 묘지도에 따르면, 묘지 산 형국이 야자(也字)임을 알 수 있다. 변계량의 아버지와 변계량의 형 변중량 그리고 변중량의 아들 변길상의 사현 묘소 지도인데 계량은 그의 아버지 바로 아래에 간좌곤향(艮坐坤向) 되었다.

 

1395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변계량은 이후 그의 선영에 자주갔었다. 부친 별세 35년 후에 변계량이 기세하는데 자신은 선영의 아래에 묻힐 것을 결심한 듯하다. 지금의 개성 동북방 약 30㎞에 위치한 장단군 구화리 야자성국(也字成局)에 변계량의 묘소가 조성되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고려조에 벼슬을 하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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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02.png 변계량 산소 위성판독 (부산대 변희룡교수)

변희룡 교수님이 변계량과 그의 형 변중량 그리고 그의 부친 변옥란의 산소를 판독한 사진을 여기에 싣습니다. 산소는 지금 북한 땅인 개성시에서 동북방으로 약 25km에 위치한 장단 구화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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