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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충오효각(一忠五孝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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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남 합천군 청덕면 어진리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변옥희, 상동, 삼중, 삼신, 삼근, 경유 창 건 연 도 사 액 연 도 향 사 일 |
의병장 변옥희 장군(1539-1593)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 본관 팔계. 자 박초(博楚). 호 평천(坪川).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 성리학을 연구하여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남성(南城)방어장이 되었다. 많은 적을 무찔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표창을 받았으나 전사하였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평천변옥희실기- 탁계 전치원 지음
본 글은 탁계 전치원이 기록한 평천 변옥희가 의병장으로 창의 순절한 사실을 적은 기록으로 나중 탁계집으로 1858년에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때 열사충신은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항거했는데 살신성인은 특별하게 한 둘을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오직 한 의사가 마음에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뜻은 간절히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다만 일초지병으로 흉봉을 막았으며 세력은 다하고 힘도 다하였으니 죽음을 보고 돌아와 그 본 군에서 순절한 선비는 평천공 그 한 사람뿐이다.
(번역)
공의 휘는 옥희이며 자는 박초이며 성은 변씨이다. 고려문하시중 휘 정실의 후손이며 아버지의 휘는 명춘이며 조의 휘는 효만이며 증조 휘는 벽이다. 어머니는 월성 이씨이다.
가정 십팔년 기해년(1539) 이 월 십일 일 경술 유시 생이다 천성이 화평하고 단아하였다. 기우가 활달하였으며 강개한 기절이 있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자호는 평천이다. 섬나라 오랑캐가 팔도에 도둑이 되어 열군이 와해되었다. 이 때에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의 우두머리로 창의했다.
통문으로 깨우치는 글이 본 군에 이르자 공은 그 처와 노비를 대암산의 안전한 곳에 두고가 동 십여 인과 더불어 거의에 대해 마주 응했다. 곧 마을 장사가 따르길 원하는 자가 백여 인이 넘었다. 이미 행오를 이루고 북을 치며 행진하며 진중을 출입하였다. 미타령에 올랐는데 왜구가 졸지에 미타령 아래에 이르렀다. 공은 휘하 장사에게 각각 두세 개의 기를 들고 숲 속 가운데에서 출몰하도록 시켜 병사로 의심하게 하였다. 이에 적은 미타령을 넘지 못했다. 그날 밤 적병 수십 명이 숲 사이로 잠행해서 그 허실을 엿보았는데 공이 공격해서 죽였다. 미타령 아래 적당이 돌에 새겨서 말하기 이 고개에 옴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익일 많은 수의 적병이 이르러 미타령을 두르며 전진했다. 말하길 빨리빨리 나와 항복하라 항복하면 부귀영화가 있다. 항복하지 않으면 간담이 땅에 처박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내가 처음 창의할 때 대군이 모이지 않았는데 중도에 너를 만나 병력이 작고 세력이 잔약하여 너의 간을 회치지 못한다. 우리 임금이 몽진하도록 했는데 그 군신의 자식이 되어 죽어도 죄가 되는데 어찌 개 양과 같은 무리에게 목숨을 구하겠는가. 빨리 죽는 것을 달게 여긴다.
적이 드디어 죽였다. 휘하 병사도 모두 진에 빠뜨렸다. 그런데 공의 아들 상동만이 홀로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며 속히 죽음을 청하였다. 한 왜인이 말하길 충신의 아들이구나 함께 죽이면 안 되겠구나 그 시신을 지고 돌아왔는데 그 때 본관 이유검이 그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아 공은 일개 서생으로서 창의하여 일초지병을 인솔하여 흉봉을 막고 적 수십을 죽였으며 미타령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오히려 공이 일찍이 일려지중이었는데 족히 왜적을 노루 쫓듯 했으며 적을 죽임이 돼지 죽이듯 했다. 그러나 일초지의 의병으로서 중도에 적으로 만나 세력 궁해지고 힘은 다하여 진이 함몰됨에 이르러 적의 소리를 꾸짖었다. 나라를 위하는 정성으로 죽음에 이르러서는 변함없는 절개로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소위 소과경과 그 한 사람으로 장순과 허원과 같은 그 한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아 공의 아들 상동은 나이가 어려 글을 몰라 그 사실을 기록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 이르러 글을 구하기에 나도 창의 토적한 사람으로서 그가 나라를 위해 순절한 행동을 상세히 안다. 글이 짧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어 그 사실을 약소하게 기록하여 이것으로써 다음 세대의 행록을 삼는다.
卞坪川玉希實記
壬辰之亂列士忠臣擧義抗賊殺身成仁者非特一二論也而獨一義士心存爲國志切復讎只以一哨之兵遮遏凶鋒勢盡力侍中諱庭實之後考諱命春祖諱孝萬曾祖諱璧妣月城李氏以嘉靖十八年己亥二月十一日庚戌酉時生天性愷悌器宇磊落慷慨有氣節受業南冥曺先生門自號坪川及島夷八寇列郡瓦解于時紅衣將軍郭再祐首倡義兵通諭之文適到本郡公以其妻孥安處大巖山中以家僮十餘人擧義響應則里中壯士願從者百有餘人卽成行伍鼓行出入鎭野登彌陁嶺倭冠卒至嶺下公使麾下壯士各仗二三旗出没林中以爲疑兵賊不得越嶺其夜賊兵數十輩潛行林間覘其墟實公擊殺之嶺下賊黨刻于石曰恨來峴云矣翌日賊大至環嶺而進曰速速出降降則冨貴榮華不降則肝□塗地云云公高聲叱之曰我初倡義旗未合大軍中途逢汝兵寡勢弱不能膾汝之肝使我君父蒙塵爲其臣子者桸有餘罪豈可求命犬羊之輩乎甘爲速桸賊遂殺之麾下士皆陷陣而獨公之子尙東哭抱父屍速請同桸一倭人曰忠臣之子不可竝殺負其屍而歸之其時本官李惟儉聞之棄城逃避噫公以一箇書生倡率一哨之兵遮遏凶鋒殺賊數十輩使不得越嶺倘使公早有一旅之衆足可以逐倭如賊獐殺賊如豕而只以一哨之義兵中途逢賊勢竆力盡以至陷陣然罵賊之聲不絶于口爲國之誠至桸不變此所謂果卿其二巡遠可三嗚呼公之子尙東年幼無文不能記其事實向余求記余以倡義討賊之餘詳知其爲國殉節之行矣不以文短爲辤略記其事以爲後日之行錄焉
<탁계 전치원 지음> 탁계선생집 권지 1<기>
전치원: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1542년(중종 37) 이희안(李希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1)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며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노흠(盧欽)·김면(金沔)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저술하였다. 문집인 《탁계집》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