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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계서원(菊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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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박증영(朴增榮) 변경복(卞景福) 이수언(李秀彦)

창 건 연 도 : 1701년(숙종 27)

사액연도

향 사 일 : 음력 3월 3일, 9월 9일

 

iq02.png 연혁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청주목 산외일면 국동리에 창건되었다. 창건당시에는 교리(校理) 눌재 박증영(訥齋 朴增榮), 백음 변경복(栢陰 卞景福), 관찰사 이유당 이덕수(怡愉堂 李德洙)등 세 분을 봉안(奉安)하였으나, 후에 정간광 지중추부사 농계 이수언(聾溪 李秀彦 )을 추향(追享)하였다. 또한 원생은 15명을 두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60년 현 위치인 내수읍 비중리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현재 초계변씨(草溪卞氏)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iq02.png 배향인물

1) 주벽-박증영(朴增榮, 1466~1494)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예조참의 박미(朴眉)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 11년(1480) 사마시를 거쳐 성종 14년(148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저작(著作)을 지냈고, 성종 17년(1486)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자를 희인(希仁)이라 한 것은 중국사신 동월의 말에 기인한 것이다. 동월은 공의 기특한 인품을 보고, “문장은 두보 같고 글씨는 조맹부같다.”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성종은 공을 각별히 사랑하여 성종 21년(1490) 용이 조각된 벼루를 하사하고, 사가독서(賜假讀書)를 명하였다. 성종 22년(1491)에는 경연시독관을 거쳐 수헌납(守獻納)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향년 29세로 졸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짓고 김일손이 애사를 지어 편찬한 [눌재유고(訥齋遺稿]와 판목이 남아있다.

 

2) 변경복(卞景福, 1538~1629)

조선중기의 효자이며, 중종 33년(1538)에 내수읍 비상리(비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탁이(卓爾)하여 나이 10세에 경전을 통독하였다. 9살 때 아버지를 잃어 그 몽상지절(蒙喪之節)의 애절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55세에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90세 노모를 업고 피난길에 나서니 왜장이 그 효행에 감화하여 피난지방(避難之方)을 지시해주고 효자의 향리에 병화(兵火)를 금하도록 명하였다한다. 모부인이 와병하자 극도로 상심하여 백방으로 문의구약(問醫求藥)하여 치유에 전력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시니 3년을 오직 죽으로 연명하고 조석으로 성묘하였다. 그 때에 역질이 창궐하여 피해가 심했으나 공의 일문(一門)에는 아무 변고가 없었으니 효행지성에 감동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상이 끝난 후에도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拜謁)하고 기일이면 10일전부터 재계(齋戒)하고 초종(初終) 때와 같이 애호(哀號)하니 공의 안면에 있는 눈물 자국을 보고 꿈속에 부모를 상봉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출천(出天)의 효행을 향당에서 찬양하고 유림에서 천거하여 조정에 주신(奏申)하니 공의 나이 65세 생존 시에 정려(旌閭)가 포양(襃揚)되었다. 인조 7년(1629) 92세의 장수로 영면하니 북이면 영하리 주왕산 건좌원에 예장(禮葬)하였다. 변경복의 지극한 효행은 [삼강행실]에도 기재되었다.

 

3) 이수언(李秀彦, 1636~167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이다. 천품이 영걸하고 재품(才品)이 탁월하여 일찍이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학식이 날로 진전하더니 현종 1년(1660) 사마시를 거쳐 현종 10년(166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벼슬을 거쳐 정언(正言)·지평(持平)을 지냈다. 이때에 곽세첩이 상소하여 우암을 무고하므로 이수언이 그 간교함을 논소하는 상소를 올리니 그 뜻이 준정(峻正)하여 사론(士論)이 이를 옳다고 하였다. 숙종 7년(1681) 응교(應敎)에서 경상도관찰사로 특진된 뒤 승지·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에 노론으로서 이산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로 풀려 나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으로 소론의 오도일을 탄핵하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예조판서·판윤·우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62세로 졸하니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iq02.png 건축물소개

1960년에 중건된 현 서원은 1972년에 중수되었는데, 정면 4칸, 측면 1간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마루방에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국계사(菊溪祠)’라는 현판을 걸었고, 앞에 ‘사현문(四賢門)’이라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사당 앞에는 ‘국계서원’이란 강당이 있다.

참고-내수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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