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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공신도비각(恭莊公神道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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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기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산 63-9 문화재 지정 : 부천시 향토유적 1호 배 향 인 물 : 변종인(1433-1500) 창 건 연 도 : 1967년 이전, 1988년 중건 지 정 일 : 1986년 4월 향 사 일 |
개요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공장공 변종인의 신도비로, 공장공 변종인의 신도비는 1986년 4월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의 형상
비좌는 문갑 무늬를 장식하였고, 옥개는 변종인 무인이었기 때문에 투구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명문장가 성현이 지었으며, 백대리석의 재료를 쓴 비신의 높이는 154㎝이고, 폭은 76㎝, 두께는 20㎝이다.
옥개(이수)는 그가 무인이었기 때문에 투구형을 하고 있으며, 비좌(귀부)는 문갑 무늬를 장식 하였다. 1996년 4월 16일 신도비에 비각을 세워 바람과 비로부터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다.
공장공의 뜻
시호를 공장(恭莊)이라 하였는데, ‘일을 조심스럽게 하여, 위를 받든 것[敬事供上]’을 공(恭)이라 하고, ‘적을 이겨내고 의지가 강한 것 [勝敵志强]’ 을 장(莊)이라 한다.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풍신이 준수하였으며, 남이 비록 자기 뜻을 거스르더라도 겨루지 않았고, 직무에 임하여서는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이 있었다.
변종인 신도비 내용을 중심으로 한 연보 정리
세종15년 (1433) 부평 이양리(里梁里)에서 탄생
세조 6년 (1460) 무과에 급제
세조13년 (1467)역신(逆臣) 이시애(李施愛)가 북방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자 세조가 이를 토벌하고자 공을 뽑아 군교(軍校)로 삼으니 분신역전(奮身力戰)한 공이 가장 뛰어남
예종원년(1469) 남해현령에 제수
성종2년(1471) 남포첨사(南浦僉使)
성종4년(1473)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체배(遞拜). 이해 겨울에 말갈족이 난을 일으키자 성종이 친히 공을 조전장(助戰將)으로 선발하여 의복을 우선적으로 하사받음
성종5년(1474) 봄에 적의 소굴로 들어가 성을 포위하여 제승을 도모하며 종일토록 매우 격렬하게 싸우니 적이 후퇴하여 도망감, 국왕이 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어의를 하사하고, 특별히 가선대부로 관품을 올렸고 그대로 이산군수(理山郡守)로 삼음
성종8년(1477) 체환(遞還)
성종9년(1478) 온성부사(穩城府使)로서 백성을 다스림에 은혜와 위엄이 있었고 아울러 적인(狄人)이 나타나 그 덕을 생각하여 감시 경색(梗塞)됨이 없었음
성종12년(1481)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제수되었고, 가을에는 공조참판으로 이배(移拜)
성종14년(1483) 전라절도사에 제수
성종16년(1485) 동지중추부사로 환배(還拜), 이후 영안북도절도사가 됨
성종17년(1486) 다시 동지(同知)가 되었고, 이해 겨울에 진위사(陣慰使)로서 중국을 다녀왔음
성종19년(1488)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제배(除拜) 됨, 전함이 대부분 썩었고 기계 또한 빠져있어서 사용할 수 없었으나 공이 아침부터 밤늦도록 마음을 다하여 무릇 적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모두 새롭게 하고 또 완벽하게 갖추었고, 또한 수졸들로 하여금 적절하게 연습하도록 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음
성종21년(1490) 공조참판이 되어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영안남도(永安南道)절도사에 제수됨, 조정에서는 북적(北狄)을 토벌하기에 적당한 시기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건주(建州)의 야인들이 투항함
성종23년(1492) 북정(北征)한 후 임기가 끝나서 돌아가려 하자 변방의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여 특별히 공을 북도절도사로 임명함
성종24년(1493) 지중추부사로 옮김
성종25년(1494) 정조사(正朝使)로서 북경에 갔을 때 북쪽 오랑캐가 또 우리나라 사람들을 능욕하자 공은 관대를 단정하게 앉아서 이들에게 화복(禍福)으로 회유하자 이들이 모두 순서대로 절을 하고는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고, 중국인들도 모두 탄복연산군원년(1495) 평안도절도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 체귀
연산군3년(1497) 왜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제사가 됨
연산군4년(149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이해 가을에 공조판서를 제수
연산군5년(1499) 여름에 순변사(巡邊使)로서 함경남도를 순심(巡審)하여 신보(新堡) 설립의 타당성을 살폈으며, 이를 지도로 그려 조정에 보고
연산군6년(1500) 봄에 병이 심해지자 국왕이 특별히 의약을 하사하였으나 풍질로 3월 18일에 정침(停寢)에서 졸하니 향년 68세였음
변종인과 안씨 부인(변창순 정리)
변종인은 젊어서부터 변경의 소임을 제수 받은 것이 모두 열두 번이나 된다고 했다. 경상 수사를 합하면 총 열세 번의 변방 생활 속에서 부인 안씨의 마음 고생이 보통이 아니었던 듯 싶다. 성종24년(1493)에 변종인 부인 안씨가 임금에게 상언한 내용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변방으로 떠도는 남편을 보면서 느끼는 여인으로서의 한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변방 생활로 말미암아 맏아들 변강지와 작은아들 변기지마저 잃어야만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어야만 했었던 한스러움도 느껴진다. 또한 자신도 병이 위독하여 생전에 남편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의 진솔함이 배가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한 세대를 살아 넘기기가 만만찮은 인간의 질곡도 엿볼 수 있어 연민의 마음까지 생긴다. 그러니 애국이고 뭐고간에 이 연약한 여인의 심정도 알아달라는 하소연을 지엄한 임금에게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임금은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개인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자였던 것이다. 그런 임금이 안씨 부인에게 손을 든 것이다. 안씨 부인은 임금에게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비통하다고까지 하소연하였겠는가? 이를 일러 민심은 천심이라 한다. 그러나 나라의 일은 여인의 안타까움만 가지고는 지켜지지 않는다. 여자도 대를 보아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서 생긴다고 하겠다. 어떻든 다음 내용을 통해 인간의 삶이 지니는 이중성을 간파할 수 있다.
성종 24년(1493) 윤 5월 16일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竊盜使) 변종인(卞宗仁)의 아내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첩(臣妾)의 지아비는 젊어서부터 군에 종사하여 변방(邊方)에 오래 있었고 연전에 영안남도 절도사로 있다가 북도로 옮겨 부임하였는데, 맏아들 변강지(卞綱之)는 아비를 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이 나서 죽었고, 작은아들 변기지(卞紀之)는 이제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으며, 신첩도 병이 위독하여 생전에 서로 보지 못할 듯하니, 비통하여 못견디겠습니다.”하였는데,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전에 백혜편(伯兮篇)을 읽고 변방 군사의 부부가 이별한 정을 불쌍히 여겨서 변방에 오래 있는 자는 돌려보내도록 허가하였다. 그러나 북도는 일이 긴요하므로 변종인이 진(鎭)을 비워 두고 올 수 없으니, 환차(換差)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것을 해조(該曹)에 물어보라.”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북도는 조두(刁斗)가 자주 경보(警報)하므로 바야흐로 성을 쌓고 있는데, 변종인은 변방의 일을 잘 아니, 환차할 수 없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변종인이 없더라도 어찌 그 직임을 비워 둘 수 있겠는가? 널리 감당할 만한 자를 가려서 환차하는 것이 좋겠다.
연산군 3년(1497) 4월 3일
연산군 3년 정사(1497, 홍치 10) 4월 3일(갑술) 경상도 수사 변종인이 아뢰기를,“신이 젊어서부터 변경 소임을 제수 받은 것이 모두 열두 번이었는데, 다행히도 국가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모두 무사하게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지난 해에는 평안도 절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중한 죄를 범하고 파면되었습니다. 신의 나이 지금 65세라서 기력이 소모되었는데, 더구나 지금 남도는 방어가 더욱 긴요하온데 국위(國威)를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사양하지 말라.”하였다.
두 대화는 국가적 소임과 한 여인의 애환이 대비되어 여기에 기록해둔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변종인 신도비는 민간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이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는 고리울 복지관이 위치해 있는 곳에 있었는데, 강상골 마을에 자주 화재가 나 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마을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로는 마을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장공의 품성과 교훈
변종인 어머니는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 조자주(趙自周)의 여식인데 어머니가 일찍이 꿈에 달을 품에 안고는 이내 공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공의 나이 18세에 비로소 사환(仕宦)에 뜻을 두어 충순위(忠順衛)에 소속되었는데, 항상 분격(奮激)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문장으로써 왕자의 치도에 도움이 안 된다면, 마땅히 싸움에 이겨 적의 깃발을 빼앗고 힘차게 말을 몰아 적왕(敵王 )이 한탄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공의 성품은 관후하고 생각함이 남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벼슬을 지내고 정사에 임해서는 바른 것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거진(巨鎭)의 중책을 역임하며 조치(措置)함이 전부 마땅하였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하였다.
평생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띠지 않고 침착하였으며,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에 항상 화기(和氣)를 띠었고, 집에 있을 때에는 청렴결백하였으며 청탁을 행하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자질(子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내 초모(草茅)에서 자라 성재(省宰)에 이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청백(淸白)함을 지켰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겸손하고 삼가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스스로 병이 들어 졸하기까지 6개월여 동안 정신이 다하지 않고 굳건하여 국가의 일만 말할 뿐 한마디도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