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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효문 신도비(卞孝文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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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시장리 산24

문화재 지정 : 경남 문화재 자료 제27호

배 향 인 물 : 변 효문

창 건 연 도

사액연도

향 사 일

 

iq02.png <신도비 번역문>

가정대부 한림학사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직제학 중추원 부사 변효문

신도비명 병 서가선대부시강원보덕원임 규장각직학사임 이정렬 찬

십오대 손 변응규 전액

십사대 손 변영인 씀

 

우리 세종대왕은 예를 만들고 악을 지은 성주이다. 현신이 곁에 있어 보필함이 많았다.

오례의를 찬집하고 일본과 외교를 도맡아 했던 분이 있으니 제학 변효문이다. 공의 휘는 효문이고 처음 이름은 계문이며 자는 일민이다. 홍무 병자 년 생이며 태종 갑오 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원년 기해 년에 죄익원종공으로 주서 한림학사를 제수 받았다. 세종 십일 년 기유 년에 종부소윤으로서 농사직설을 고정하였으며 문득 예조 좌랑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종 십오 년 계축 년에 집현전 교리로서 상소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는 비와 햇빛을 내리는데 이것이 고르지 못하면 재앙입니다. 사람에게는 구황과 극휼의 방책이 있습니다. 하늘은 심히 견고하여 알 수가 없으니 사람이 구휼하는 정을 감히 늦출 수 없습니다

 

.”세종 십칠 년 갑인 년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전라도 선위 별감이 되었다. 세종 십칠 년 기묘 년에 명나라 사신이 내방했는데 공이 사재관으로서 문예관이 되었다. 세종 십구 년 정사 년에 충청도에 기근이 있었는데 판중추 안순이 진휼사가 되고 공이 봉상시 소윤이 되어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세종 이십 년 무오 년에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임금에게 강력히 상소하기를 요순의 도는 행해짐에 모두가 흡족해 하였으며 노자와 부처님의 도는 행해짐에 항상 어지럽히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임금의 귀감이 됩니다고 말했다. 이십일 년 기미 년에 내시섬사로서 종묘에 친사하는 의주를 개수했는데 중추원사로 승진했다.

 

이십오 년 계해 년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자 했으나 인선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모두 공을 천거했다. 임금이 인견하여 말하길 나는 공의 어머니가 나이가 많이 드셨음을 알고 나는 조정의 신하 중 나이 많은 부모가 있을 시 멀리 사신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 경을 보내어 대임을 맡기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는 안 되니 부득이하게 경으로 결정했다. 경은 어머니에 대해 안심하고 다녀오라. 이어 의복과 삿갓과 가죽신 등을 내렸다. 공의 어머니가 공에게 말하길 사명은 국가의 대사로 임금은 너에게 달려 있으니 힘써 임무를 달성함이 성상을 도움으로서 어려움을 만나면 곧 나는 죽으나 역사에 영원히 남으리니 정에 끌리지 말고 왕사에 충성을 다하여라.

 

공은 부사 윤인보서장관 신숙주와 더불어 갔다.

 

신숙주가 지은 변효문 시권의 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바다와 육지가 사천 여리나 되어 여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길에서 잠을 자야 하고 도적이 일어나 죽이려 했으며 도로는 막혀있으며 험난한 여행길에 수 개월을 허비하여 마침내 도착하여 기회를 따라 선함을 도모하니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또 이 때 일이 한가함을 보아 일본의 고적을 기록하고 국가의 연혁을 썼으며 그 지리를 보고 지도로 그렸다. 8월에 복명하니 임금이 편전에서 인견하여 말하길 경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 공의 어머니 또한 건강하시니 나 또한 심히 기쁘다. 하고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 공을 총애했다.

 

하연과 성삼문등 제 진신들이 시로서 그를 축하하고 보한재 신숙주는 연회 시권의 서를 썼다. 세종 이십육 년 갑자 년에 오례의주를 산정하고 이 때 삼한국부인 안씨가 졸하니 공이 홍문관 대사성으로서 중궁분상 성복의를 수행했다.

세종 이십칠 년 을축 년에 평원대군 임이 졸했는데 공을 예문관 직제학으로 호상의 일을 명하였다. 세종 이십팔 년 병인 년에 소헌왕후 심씨가 졸했는데 공이 제조가 되었으며 경창부윤으로서 가빈군흉 등의 예를 찬정했다. 단종 이 년 계유 년에 음양학 제조 단종 삼 년 갑술 년에 중추원부사가 되고 경주부윤 전주부윤이 된 후 단종 사 년 을해 년에 목사가 되었는데 이는 공의 이력이다.

 

그의 세덕은 문하시중 팔계군 문열광 휘 변정실이 상조이며 여기에서 시중 변광이 나시고 공의 고조는 변치로 추충부록사이며 증조는 변경으로 좌우위보승대장군을 지냈으며 조부는 문하평리 변빈이다. 변빈은 고려 운을 보고 정몽주 이색 등 제 공과 술잔을 함께 하며 세태의 안타까움을 시로 화답하여 회포를 기록하고 이어 술자리를 파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였으며 두문서원에 향사되었다. 아버지는 변남룡으로 시랑으로 태조의 옛 스승이기에 한성판윤을 제수했으나 스스로를 지켜 나아가지 않아 제주도에 유배가게 되었다가 드디어 죽음을 받았다.

 

어머니는 충주 지씨와 원평군 부인 곡성염씨가 있는데 공은 곡성염씨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정부인 삭령최씨이며 묘는 직산의 천흥산 유좌원에 있으며 아들 셋을 낳았다. 변균은 직장, 변심은 군수, 변이흠은 현감, 직장의 아들 변성은 군수 그의 아들 변승종은 참봉, 변승세 변승조는 현감 그의 아들 변진은 감찰 변서는 사과 변정은 주부다.

 

이 때로부터 변씨의 성이 창성하게 되었다. 변형량은 교리 변충남은 판결사 변훈남은 군수로 청백리 변안인은 부장 변우인은 사마 변동원은 교리 변경수는 생원 변경복은 처사로서 효가 하늘에 닿아 조정에서 효자문을 세웠으며 변유청은 참봉 변유정 변유인은 학덕이 있었으며 변유인은 장장악원정을 추증했다. 변유명은 사정 변정량 사정 변정량은 통제사 변시민은 부사, 변시립은 학덕이 있었고 변시망은 호조좌랑 변시황은 문과에 합격, 청백리가 되고, 변시익은 승지,시석은 지평이 추증되고, 변계는 진사 변항은 사과 변종로는 중추 변동규는 진사 변동상은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변동량은 감역, 변동윤은 학덕이 있었으며, 변동흡은 첨중추 변복하는 학덕이 있었으며, 변석하는 지평이 추증되고 변희하는 참봉, 변관하는 익찬 변익하는 학덕이 있고 효자각이 세워졌다. 변성하 변지섭, 변지정 등은 모두 학덕이 있었고, 변지건은 수사 변지명은 생원이었다. 변화중은 학덕이 있었으며, 변지영은 부사, 변지복은 동추 변운서는 효로써 널리 알려졌으며 변종진은 생원 병위진은 부사, 변풍진은 학덕이 있었고 변익진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효로서 칭찬을 받았다. 변호응은 무과로 가선이 되고 효행이 있었다. 영오는 사과, 영준은 학덕이 있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묘는 직산의 종정산에 신좌에 있는데 항상 미병이 빠져있어 그 후손이 무징함을 꺼려함이 오래되었다. 대비를 묘도에 수립하자 변영균, 변남규, 변문규등이 월암산에 있는 나를 찾아 그 명을 청했다. 이에 욕되게 할까 망령됨에서 벗어나고자 문의 재주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변대부 묘에 누가 될까 또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고 사양했다. 사양을 고집스럽게 했으나 청함이 더욱 간절함에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상장과 왕조의 기록을 뽑아 살폈다.

 

공의 이력은 사년 기해년까지 공은 육십까지 벼슬을 하여 조정에 큰 업적을 세움이 많았으며, 늙어 경상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경주부윤 전주부윤을 지냈다 . 그 상황을 공이 보고 물러나야함을 알고 은거를 결정하였다. 사람을 씀에 누르고 장차 정난을 경영함이 있었으니 공의 충직을 꺼려함이었다. 고로 밖으로 멀리 옮겼던 것이다. 문적은 없으나 가히 상고할 수 있으니 뒷사람이 감히 그 위대함을 가슴으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에 명으로 풀어 말한다.

 

돈독한 충의로 세계를 이었으니, 평리는 은둔하고 남룡은 유배보냈다가 죽였네.

변효문은 민첩하게 과거에 우뜩 합격하여 조상의 업을 이었구나

뛰어난 재주는 깊고 정치한 학문이 있고 성스러운 임금을 만났으니 왕 우리 세종이라

고기가 이내 물을 얻었으니 구름은 반드시 용이 있어야한다

임금이 예서를 찬하라고 명하니 붓을 잡은 자 오직 공이었네

뛰어남을 보고 칭찬하고 임금명을 받들어 일본가니

뛰어난 현재는 오로지 홀로 꺼려하지 않았네

배를 내어 큰바다 건너가니 바닷길은 삼천리요 바람과 파도는 심히 악독했구나

배에 있는 사람 모두 놀라고 공은 홀로 자약하니

명은 하늘에 있다네 험로의 수개월 지나 마침내 뜻을 얻으니

일의 쉽고 어려움은 오로지 정성 하나로 팔월에 복명하니

세종대왕은 심히 기뻐하고 공과 노모의 노고를 위로하여 연회를 성대히 베푸네

임금이 내린 음악이요 임금이 내린 음식이라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기누나

진신들이 와서 축하하니 글과 시로서 하는 구나

음덕을 쌓음이 그윽하니 사존이 떨치고 일어나고

도를 따르고 의를 권하니 옥돌에 새겨 나는 그 명을 펼치니

직설이요 꾸밈이 아니네 공을 보고자 하는 자

이를 볼지어다.

 

기축년(1949)시월 일 세움 (平和)

 

변효문 신도비 번역

 

iq02.png <원문>

嘉靖大夫翰林學士成均館大司成藝文館直提學中樞院副使卞公神道碑銘幷序

嘉善大夫侍講院輔德原任奎章閣直學壬李貞烈撰

十五代孫應圭篆

十四代孫榮寅書

我世宗大王實制禮作樂之聖主也賢臣際過而輔弼者多矣至於纂輯禮書專對外國必提學卞公也公諱孝文初諱季文字一敏洪武丙子生太宗甲午文科世宗元年己亥佐翊原從功除注書翰林學士十一年己酉以宗簿少尹考訂農事直說俄遷禮曺佐郞陞正郞十五年癸丑以集賢殿校理上疏有曰天有雨暘不均之災人有救荒克恤之方天深固不能豫人所救恤之情不可緩也十六年甲寅以藝文館直提學爲全羅道宣慰別監十七年己卯明使來公以司宰官爲問藝官十九年丁巳忠淸道飢

 

判中樞安純爲賑恤使公奉常少尹爲從事官二十年戊午以成均館大司成必上疏有曰堯舜之道行而世無不洽老佛之道與而時無不亂乃帝王之龜鑑云二十一年己未以內寺詹事改修宗廟親祀錄注是感陞僉知中樞院事二十五年癸亥欲遣使於日本而亂其人朝廷咸以公遷上引見謂公曰予知公老母予於朝臣有親老者不欲遠使今遣卿者以專對之任非人人所爲不得已也卿其安心往還仍賜衣服笠靴等物公母夫人公曰使命國之大事上屬之汝汝竭心力果能勝任以副聖上知遇則吾死且不朽勿拘使情盡忠王事公與副使尹仁甫書狀官申叔舟曰叔舟海陸四千餘里櫛風沐雨且盜賊蜂起道路梗塞間關數月始乃得扺隨機善圖不辱君命又於視事之暇記其古迹及國代沿革圖其地理閱八月而復命上引見便殿曰非卿安能如是卿母亦無恙予甚喜焉特賜宴而寵之河相國演成學士三問及諸縉紳以詩賀之保閒齋申叔舟作賜宴詩卷序二十六年甲子定五禮儀注時歲三韓國夫人安氏卒公以弘文館大司成定中宮奔喪成服儀二十七年乙丑平原大君琳公以藝文館直提學承命護喪事二十八年丙寅昭憲王妃沈氏薨公爲提調尋爲慶昌府尹撰定嘉賓軍凶等禮端宗二年癸酉爲陰陽學提調三年甲戌爲中樞院副使出爲慶州府尹尋遷全州府尹四年乙亥爲判牧使此公之履歷也其世德則以高麗門下侍中八溪君文烈公諱庭實爲上祖是生諱光侍中四傳而諱緻推忠府錄事寔公之高祖也曾祖諱卿左右衛保勝大將軍祖諱贇門下評理見麗運將記與鄭圃隱李牧隱諸公把酒賦詩傷時丢淚而擺歸隱于杜門洞香杜門書院考諱南龍侍郞我太祖以甘盤之舊除漢城判尹自靖不就謫濟州遂賜死前妣忠州池氏後妃原平郡夫人曲城廉氏公後妃出也配貞夫人朔寧崔氏墓在稷山天興山酉坐原育三男鈞直長鐔郡守李欽縣監直長男珹郡守男承宗參奉承世承祖縣監男珍監察瑞瓚司果玎主簿自是子姓昌阜亨良校理忠男判決事勳男郡守淸白吏安仁部將友仁司馬潤源校理景壽生員景福處士以孝蒙天朝旌00惟淸參奉惟精有學行惟寅有學行贈掌樂院正有明寺正夢亮統制使時敏府使時立有學行時望戶曹佐郞時煥文科淸白吏時益承旨時奭贈持平昱生員成溫有學行成振參奉廷彪秉節校尉揆進士抗贈執義榥文科參議揚有學行搏參奉橚有學行抑司果宗魯同中樞東規進士東尙贈吏判東亮監役東尹有學行東翕僉中樞復夏有學行錫夏贈持平熙夏參奉觀夏翊贊益夏有學行以孝旌星夏至燮至鼎皆有學行至健水使至明生員和中有學行至英府使至復同中樞雲瑞以孝著宗鎭生員緯鎭府使豐鎭有學行益鎭贈戶判以孝稱浩應武嘉善有孝行榮五司果榮駿有學行餘不錄公之墓在於稷山松亭山負辛之原而尙闕桓楹之銘後孫懼夫愈久而無懲也樹大碑於隧道榮潤南圭文圭訪余於月岩山中以其銘爲辱不佞固不敢以拙文累賢大夫墓且衰退閣筆久矣辭之固而請益勤不獲已按其狀與抄出國史錄公之履歷至於端宗四年乙亥而正時公年六十歷事朝勳業其多宜以耆舊致位於卿相出爲慶州全州兩府尹0也其戌公見幾引退遂投緩歸隱歟抑用事之人將營靖難而忌公忠直故遠遷於外歟無文跡可考後人不敢臆度00其大者如右系之以銘曰

 

000表 世篤忠義 評理隱遁 侍郞謫死 公捷魁科

克紹先業 英烈之才 精邃之學 際遇聖主 曰我世宗

魚乃得水 雲必後龍 命簒禮書 執筆惟公 睿覽稱賞

乃嘉乃功 奉使日本 不憚獨賢 發船巨濟 海路三千

公則自0 風濤甚惡 舟人愕然 歸命于天 間關數月

始乃得扺 遇事難易 一以誠處 八月復命 上心喜悅

爲公母努 賜宴盛設 御樂御饌 人皆榮之 0紳來賀

文與序詩 積陰冥 子姓振振 隧道侑儀 貞珉過仞

我述其銘 直而不華 如欲知公 盖觀於斯

己丑十月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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