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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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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서두문동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정몽주, 이색, 임선미, 변빈등 총 199위 창 건 연 도 : 1934년 사액연도 향 사 일 : 음력 10월1일 |
개요
두문동서원은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위치하며 고려말 충신들이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말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두문동 72현
이 서원의
표절실 순절반(表節室殉節班)에는 박문수(朴門壽 : 竹山人)외 16위,
표절실 항절반(表節室抗節班)에는 김충한(金충漢 : 慶州人)외 30위,
표절실 정절반(表節室靖節班)에는 배상지(裵尙志 : 興海人)외 6위,
순절실 순절반(殉節室殉節班)에는 정몽주(鄭夢周 : 延日人)외 10위,
항절실 항절반(抗節室抗節班)에는 이색(李穡 : 韓山人)외 32위,
정절실 정절반(靖範室靖節班)에는 김주(金澍 : 善山人)외 19위 등을 봉안하고 있다.
변빈은 표절실 정절반 제2위에 있다.
고려말(高麗末) 대호군(大護軍) 휘(諱) 변경(卞卿)의 아들로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이품(正二品)이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에 판서 성만용(判書 成萬庸), 박사 정몽주(博士 鄭夢周), 제학 홍재(提學 洪載), 대사성 이색(大司成 李穡), 전서 김성목(典書 金成牧), 전서 조열(典書 趙悅), 진사 이오(進士 李午), 단구 김후(丹邱 金厚) 등과 때 없이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며 세상을 한탄(恨歎)하고 슬픔을 달래는 시(詩)를 주고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은(殷)나라가 망할 때를 상기하여 서로 말하기를 은(殷)나라에는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왕을 간(諫)하다 죽음을 당하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우리도 각자의 뜻에 따라 처신(處身)하자 하니 다 말하기를 좋다하고, 홍재(洪載)는 삼가(三嘉)로 돌아가고, 김후(金厚)는 상산(商山)으로 갔으며, 조열(趙悅)은 함안(咸安)으로 돌아갔다. 변빈(卞贇)선생은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자정(自靖)하여 고려조(高麗朝)에 충절(忠節)을 지켰다.
고려충신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분으로서 개성(開城)의 두문동서원 표절실정절반 제이위(杜門洞書院 表節室靖節班 第二位)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봉안문(奉安文)
아! 선생이시어 초계(草溪)의 전통있는 집안으로 고려(高麗)에서 평리(評理)를 지내셨으나 황천(皇天)이 돕지 아니하여 나라의 운세(運勢)가 이미 끝났도다. 공(公)의 집에 하루 저녘 친구를 초청하였으니 성씨(成氏), 홍씨(洪氏), 정씨(鄭氏), 이씨(李氏)로다.
은(殷)나라에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도다.
각자가 뜻에 따라 행동하자 말을 마치고 모임을 파하니 두문(杜門)골이 가히 청결(淸潔)한 곳이라 하고 남쪽 궁궐(宮闕)을 바라보며 통곡하여 슬퍼하고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끝났도다 하였는데 진실로 선생의 망복지의리(罔僕之義理)로다.
옛 마을에 사람은 새로운데 천리(天理)는 어길 수 없어 정절반(靖節班)에 향사(享祀)를 올리고자 맑은 바람 오랜 세월에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바치오니 흠향(歆饗)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