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및 유적
home > 유물 및 유적
고려평리공(高麗 評理) 변빈(卞贇) 墓
페이지 정보
본문
소 재 지 : 충남 천안시 직산읍 남산리 37-1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변빈, 변남룡 창 건 연 도 : 1988년 사 액 연 도 향 사 일 |
변빈(卞贇)의 두문동기
번역문 문하평리 변 선생 실적
변빈은(8세) 고려말 대호군을 지낸 휘 변경(卞卿)의 아들로 벼슬이 문하평리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에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김성목 전서 조열 진사 이오단구 김후 등과 때 없이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며 세상을 한탄하고 슬픔을 달래는 시를 주고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은나라가 망할 때를 상기하여 서로에게 말하였다. 은나라에는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은 왕을 간하다 죽음을 당하고, 미자는 떠나갔으며, 기자는 종이 되었다. 우리도 각자의 뜻에 따라 처신하자 하였다. 다 말하기를 좋다 하고, 홍재는 삼가로 돌아가고, 김후는 상산으로 갔으며, 조열은 함안으로 돌아갔다. 변빈 선생은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봉안문 아! 선생이시어 초계의 전통있는 집안으로 고려에서 평리(評理)를 지내셨으나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고려의 운이 이미 끝났구나! 공의 집에 하루 저녁 친구를 초청하였으니 성씨, 홍씨, 정씨, 이씨로구나! 은나라에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은 죽고, 미자는 떠나갔으며, 기자는 종이 되었도다. 각자가 뜻에 따라 행동하자 말을 마치고 모임을 파하니 두문골이 가히 청결한 곳이라 하고 남쪽 궁궐을 바라보며 통곡하여 슬퍼하고 우리의 종묘와 사직이 끝났구나! 선생은 망복지의리를 지녔구나! 두문동의 옛 사당이 새롭게 됨은 진실로 하늘의 이치를 속이기 어렵기 때문이네 뒤미쳐 제향을 하는 것은 반열을 고르게 함이고 사대부의 풍을 맑게 함이었네 천 오랜 세월 동안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이에 살진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바치오니 정성스러운 제사 흠향하옵소서!
원문
門下評理 卞 先生 實蹟
先生諱贇草溪人大護軍卿之子官門下評理麗運將訖先生與判書成萬庸博士鄭夢周提學洪載大司成李穡典書金成牧典書趙悅進士李午丹丘金厚不期而會把酒哦詩傷時慨惋垂泣而言曰殷有三仁比干死微子去箕子爲奴各自隨意行之皆曰諸洪載歸三嘉金厚歸商山趙悅歸咸安而先生歸于杜門洞
奉安文
嗚呼先生草溪故家高麗評理皇天不弔國事已矣公堂一夜招我同志曰成曰洪曰鄭曰季殷有三仁比干則死微去箕奴各自隨意言志旣罷見幾而起杜門洞泉可以潔已南望痛哭哀我宗社允矣先生罔僕之義洞舊廟新難誣天理躋享靖班淸風千祀牲肥酒享庶飮禋祀
이채가 찬한 조열의 신도비에도 또렷이 새겨져있다.
다음은 이채의 저서 <화천집 13권>에 등장하는 변빈에 대한 내용이다. 붉은 선 안에 평리 변빈이 있다.
변시연은
아! 고려는 비록 망하였지만 군신의 대의는 함께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천고의 거울과 가르침이 되지 않겠는가? 공이 조정에서 한 일은 세대가 멀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큰 절개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일대 명류들이 공을 위해 칭송하고 기술함이 성구사지와 두문동지에 소재되었으니 다시 여한이 없도다.라고 변빈의 묘갈에 기록하고 있다.
배록동 여든 분(최권흥, 2010)에서는 변빈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성구사는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에 있다.
변평리 공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의 휘는 빈이며 초계인이다. 고조의 휘는 돈미이고 추봉 좌우위보승랑장이고 증조의 휘는 용이고 검교감문 대호군이다. 조의 휘는 치이고 추융부 녹사다. 고의 휘는 경이고 봉상대부 좌우위 보승대호군으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민첩하여 충효로써 가훈을 삼았다. 학문에 독실하여 등과 후에 벼슬이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고려말을 당하여, 성만용, 이색, 정몽주, 홍재, 김성목, 조열, 이오, 김후 등 여러 어진 이와 더불어 강상을 바로잡아 붙들고자 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갔다. 이에 선죽교의 슬픈 일이 일어나자 하루는 모든 어진 이들이 기약없이 모여서 술잔을 잡고 때에 일을 슬퍼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은나라에 세 어진 이가 있었는데 비간은 죽고, 미자는 떠나고 기자는 종이 되었으니 각자 뜻을 따라 가라 하니 다 같이 좋다고 하였다. 흩어져 돌아가니 공은 두문동으로 숨었다.천수로 몸을 깨끗이 하고, 남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우리 고려는 망하였으니 몸을 마치도록 망복의 의를 지키겠노라 했다.
산소는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남산리에 있다. 부인은 정부인 이씨다. 혼을 불러 합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단기 사천삼백십팔 년 을축년이다. 1남이 있으니 남룡이다. 문하시랑을 지냈고 송헌이 공부를 배워 스승으로 섬겼다. 고로 신조에서 한성판윤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자, 내쳐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4년 뒤에 석방되었다. 오호라 한 집안에 쌍절신이 나왔도다. 기려 노래하노니
7월 달 한 수레를 달려 합포에 이르르니
옛 사당 기와집이 세월을 견뎌내고 있도다
중방 현판을 쓴 뜻은 자손들의 정성이요
비석에 쓴 글 빛은 충절의 향기로다
과거에 올라 벼슬에 나가니 2품에 올랐고
망한 나라의 의론을 따르니 은나라 세 어진 이와 같도다
새로운 조정에서 아들을 불렀으나 가훈을 지켰으니
역사 위에 변씨 문중은 오래도록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