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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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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변계량(1369-1430) 창 건 연 도 중 건 연 도 향 사 일 |
춘정 변계량 신도비
선생은 밀양 변씨 검교공(변옥란)과 정경부인 창녕 조씨의 슬하에서 태어나시니 1369년 을유였다. 휘는 계량(季良)이요 호는 춘정(春亭)이며 자는 거경(巨卿)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6세 때 작시하는 총명과 비상을 겸하였고 1382년 14세 때 진사 생원을 거쳐 17세 되던 해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2년 후인 1387년에 첫벼슬 징사랑 전교서 주부로 출사하였으며 항상 교육과 문자 찬술을 겸하였다. 선생은 왕조교체 격변기에 운신의 제약은 따랐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그 높은 학문과 덕행이 항상 같이 하였고 당대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수학한 성리학자요 양촌 권근과 함께 소위 관각 삼걸로 일컬어지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석학이며 유신이었다.
1400년대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문형으로 숭앙받았으며 세종 때는 집현전 대제학까지 겸함으로써 20여년 동안 문형의 자리를 지키면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궁중 부중의 대소사명의 제작 고려사 개수 태조 태종 실록 편찬 과거시험 관장 제사 연향 등 예악규범의 관장 집현전 설치와 효행록 간행 대마도의 왜구 본거지 정벌 건의 사가 독서의 인물 양성 제도의 실행 등 새 왕조의 문물 정비를 주도하였고 원단제천론을 제창하여 민족주체사상을 일깨우며 항상 애민 정신과 청렴결백한 삶을 영위하면서 당대의 환인 학자 문장가 교육학자로서 관학 학맥의 거봉을 이루어 태두로 숭앙받았으며 화산별곡 등 가사체의 문학은 우리나라의 경기체가의 시초를 열었다.
선생은 일대를 통하여 1407년 4월 39세 되던 해에 친시과에서 제1인이 되어 전, 노, 어비를 하사받아 도약의 행을 누렸으며 1426년 58세 되던 해에 숭정대부에 올라 판우군도총제부사 겸 세자이사를 더하였고 줄곧 문형으로서 문묘 기자릉비문과 낙청정기를 찬하여 말년의 글향기를 듬뿍 피웠다. 그리고 흥덕사 사고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마무리하시다가 그해 1430년 4월 23일 계사에 기세하시자 사대부 예장 절차에 따라 그 해 6월 장단군 구화리 선고의 영역 간좌에 왕의 제문과 부의관 그리고 세자의 부의미두 삼십 석을 내려 성대한 의식 속에 고이 잠드셨다.
그후 선생의 문집은 왕명으로 내려 1442년에 밀양에서 초간되었고 1824년 거창 병암서원에서 12권으로 중간되고 1937년에 대구에서 그간 빠진 자료를 모아 속집 '34권이 간행되어 보전으로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35년 을해(乙亥)에 선생의 제단을 이 곳에 모시었고 1937년 정축(丁丑)에 관향 구령리에 판서공 춘당공 춘정공의 부자 삼현의 유허비가 세워져 오늘날 문화재로 지정되어 남아 있으며 그 이전의 1768년 무자(戊子)에 거창 병암서원에서 춘당공과 함께 배향되어 왔으나 아깝게도 1871년 신미(辛未)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공허하던 차에 1938년 무인(戊寅)에 봉양서원을 중건하면서 춘당 춘정 양 공위를 배향하였고 1998년 무인(戊寅)에 숭현사에 양 공위의 그립던 영정을 모셨다.
문하 유림에도 기리 그 높은 학문을 받들어 세사를 올린 지 어언 60여 년!차마 가려 분간하기 어려운 크나큰 업적들이 600년 향기로 피어 구화리 신도의 명은 아닐지라도 숭모의 명으로 여기에 겸허히 봉정(奉呈)하나이다. 이곳 명당 가마실 비슬 영산의 정기가 남맥으로 이어 봉양에 감도는 숭현사 신역아래 탁절공훈을 빗돌에 정갈히 새겨 천재의 귀감으로 바쳐 머리 숙여 숭배하니 만대로 이을 후예들의 거룩한 혈연윤기가 항상 이곳에 머무리라 2000년 경진(庚辰) 4월 18일(음 3월 14일)
춘정공 십칠세손 변병영 근 찬 서
변계량 묘지도-(변수남 기록)
변세교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부산대 변희룡교수가 이 영인하여 제공한 묘지도에 따르면, 묘지 산 형국이 야자(也字)임을 알 수 있다. 변계량의 아버지와 변계량의 형 변중량 그리고 변중량의 아들 변길상의 사현 묘소 지도인데 계량은 그의 아버지 바로 아래에 간좌곤향(艮坐坤向) 되었다.
1395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변계량은 이후 그의 선영에 자주갔었다. 부친 별세 35년 후에 변계량이 기세하는데 자신은 선영의 아래에 묻힐 것을 결심한 듯하다. 지금의 개성 동북방 약 30㎞에 위치한 장단군 구화리 야자성국(也字成局)에 변계량의 묘소가 조성되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고려조에 벼슬을 하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변계량 산소 위성판독 (부산대 변희룡교수)
변희룡 교수님이 변계량과 그의 형 변중량 그리고 그의 부친 변옥란의 산소를 판독한 사진을 여기에 싣습니다. 산소는 지금 북한 땅인 개성시에서 동북방으로 약 25km에 위치한 장단 구화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