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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변씨십삼충훈유허비 (草溪卞氏十三忠勳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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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남 장흥군 안량면 수양리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홍원(17), 홍제(17), 홍주(17), 덕황(18), 변국간(16), 홍건(17), 홍달(17), 홍적(17), 홍선(17), 홍량(17), 덕장(18), 덕일(18), 공의(18) 창 건 연 도 : 1968년 사 액 연 도 향 사 일 |
초계변씨 십삼인 충훈 유허비
(번역)
무릇 대지가 광대하고 지령이 모인 바에 인물이 흥해지는데 그것이 세상에 드물고 아름답게 빛나는 행적이 된다. 그렇지만 그가 사는 향리까지 빛나게 하는 경우는 또한 많지가 않다. 좌측 바다에 좁은 남단의 구역에 한 집안과 한 마을이 있는데 십삼 충훈이 왕성히 일어났으니 그것은 하나의 기운이 우주를 뚫어낸 빛이 넘쳐 흘러났음이라 할 수 있겠다. 호남의 장흥부 동쪽 십 리에 평편한 들이 있으니 이 곳을 동촌이라 하니 곧 변씨가 대대로 살아왔던 곳이다.
초계 변씨는 고려시중 문열공 변정실이 상조가 된다. 칠세는 문하평리를 역임한 변빈으로 고려의 운이 끝에 이르자 정몽주 등 제현과 더불어 망복의 의리를 지켰다. 시랑 변남룡은 호가 정암이며 조선에 들어와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삼전하여 변온은 장흥부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조정암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장흥 동촌에 처음으로 들어와 거주하였다. 변온은 첨사 변효충 낳고 변효충은 의금부도사 변희손을 낳았다. 변희손은 변국형을 낳았는데 아들이 있었다.
그는 변홍원이며 호는 월계이다. 기질이 헌걸차고 경사에 해박하게 통했으며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권율 장군에게 나아가 여러 번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정유년에는 동생과 작은 조카들과 더불어 이충무공에게 나아가 몸을 다하고 힘껏 싸웠다. 조금 후 이충무공이 모함을 입어 압송되어 가자 억울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후 충무공이 석방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회령포로 가서 이순신을 맞았다. 이순신이 공의 손을 잡고 그를 격려하기를 “나라가 어려운 때이니 자신의 몸 돌보기만 생각하지 맙시다” 하니 변홍원이 말하길 “죽을 곳에서 죽는 것은 대장부의 떳떳한 일입니다”하며 적진을 누비었다.
명량에 적세가 치열하였는데 공은 김응성 안위 등 제 장과 더불어 돌격하여 들어가 분투하여 큰 승리를 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어서 왜구가 고향의 지경으로 침입했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장흥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니 적을 막는데 어찌 조금도 지체하랴”여러 형제와 더불어 정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지포로 향하여 적을 무찌르는 전쟁 중 총알이 명중하여 전쟁터에서 졸하였다. 충무공이 애석히 생각하고 임금에게 아뢰니 통정대부로 추증했다.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변홍제이며 훈련판사이다. 지포전투에서 형과 함께 순국했다.
막내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주였으며 호는 송천이었다. 뜻과 기개가 깊고 과묵했으며 용기와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권율원수에게 나아가 영호남 지방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고 아버지와 형이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충무공을 따라 군무를 도왔는데 이충무공이 모함을 받았다. 이에 개연히 눈물을 흘렸다. 이충무공이 복임하자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백남진 문영개 마하수 정명열 김성원 등 300여인의 의사와 함께 전선 십여척을수리하여 회령포 이순신의 진으로 들어갔다.
충무공이 크게 기뻐하며 “이와 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 몸을 희생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공을 충성스러운 사람의 기상으로 느끼지 않겠는가? ”변홍주가 이어 근해에 배를 나란히 배열하니 군세가 크게 진작되어 이에 연전연승함이 있었다. 형과 여러 형제들이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길 “홀로 잔명을 보전하는 것이 장차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힘껏 명량과 노량 등지에서 싸웠으며 남해운대에서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져 순국하게 되었다. 임금에게 아뢰어 병조참의를 증직받았다. 예장을 명령하고 선무원종훈이 되었으며 금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덕황이었다. 가학을 이어서 공부했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스러운 절개가 있었다. 용맹한 아버지를 따라 명량 노량에서 싸워 연전연승 했으며 남해운대에 나아가 싸우다가 아버지가 전사하자 공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길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홀로 살아 무엇하리요?”곽산에 이르러 격전을 치르고 마침내 해를 만났다. 수사에 증직되었다.
월계 변홍원의 종부는 변국간이다. 기개가 위대하고 담략이 신이했다. 17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일곱 고을의 병사와 수사를 역임하였다. 위임되는 곳마다 모두 치적이 있었다. 중종조에 변방의 오랑캐 침입이 예측할 수 없이 잦았다. 공이 제압하여 막아 공훈을 세움이 많았다. 만년에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여 영중에서 졸하니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예장을 명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건이다. 체구가 건장했으며 관은 첨사였다. 정유년에 두 동생과 백남진 의사 등과 함께 회령 충무공진을 협조했으며 포위되어 두 아우와 함께 동시 순절했다.
둘째 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변홍달이며 호는 규암이다. 총명함이 따를 자가 없었으며 보습을 화살로 만들 능력이 있었다. 아버지 변국간을 따라 변방의 오랑캐를 토벌할 때 아버지가 포위되자 돌격하여 포위된 아버지를 구했다. 오랑캐는 패하여 도망갔는데 이 이후로 변방에 근심이 생기지 않았다. 중종 임금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길 “생령을 보호하고 사직을 평안히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의 간성의 인물이다”하고 해바라기꽃을 내리시고 종성부사에 특배했다. 임진왜란 때 대가가 서쪽으로 피란가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길 “임금이 몽진을 가셨으니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으리오!”하며 의병을 일으켜 체찰사 이원익 막하에 갔다. 이원익은 그의 담략의 씩씩함을 보고 전봉장으로 삼았다.
권율 장군과 명성과 위세가 서로 같았으며 대첩의 공을 세웠다.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하니 공이 관군의 전봉장으로서 충무공 막하에 가서 난을 평정할 것을 피로서 맹서했다. 회령진의 지포에서 침입한 적을 막으며 남포까지 추격하였다. 연일 혈전에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형세가 심히 위태로웠다. 공이 힘껏 말을 채찍하여 포위에서 벗어나 많은 적을 참살했다. 적장이 서로 놀라 탄식하길 “흑면비장이다!”당포전으로 나아가서 여러 형 동생 십여 인과 동시 순절했다. 선무원종이등훈에 녹훈되었으며 북병사에 추증되었다.
셋째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적이었다. 용기와 힘과 의리와 기개가 뛰어나 짝할 자가 없었다. 정유재란 때 형 변홍건과 의병을 모집하고 적을 공격했는데 형이 포위된 것을 보고 동생 변홍선에게 말하길 “형이 사지에 들어갔으니 동생인들 어찌 홀로 살겠는가!” 동생 변홍선과 함께 바로 뛰어들어가 형을 도와 죽도록 싸웠다. 적이 의롭게 여겨 풀어주려고 하였으나 후환을 생각하며 말하길 “용력이 절등하니 어찌 흑면비장의 형제가 아니겠는가?”하고 아울러 형제 3인을 해했다.
막내 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변홍선으로 사복시정이다. 힘과 담략이 함께 갖추어져 뛰어났으며 정유년에 여러 형과 의사들과 함께 전선을 정비했으며 말을 달려 회령포에 있는 충무공을 보았다. 충무공이 그 충의를 장려했으며 공은 근해에 포진시켜 군세를 진작시켰으며 승리함이 있었다. 당포전에 이르러 화살이 떨어지고 응원군이 끊어지매 여러 동생들과 함께 진에서 순국했다.
사촌 아우가 있었는데 이름은 변홍량이고 호는 동계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을 이끌고 장수로 나아가 금산 무주의 적을 방어했다. 영남으로 향하여 성주, 개녕의 적을 격퇴하였다. 정유년에는 문영개, 정명열등과 함께 명량의 적을 추격하였으며 한산도를 지키는 것을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을 이끌고 충무공에게 갔다. 충무공 이순신은 간성의 재목이라고 공을 격려하였으며 지포전에서 적 수천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다. 그러나 꺽이지 않고 상처를 묶고 싸서 독전하다가 군인들 속에서 마침내 전사했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금산사에 배향되었다.
첨사 변홍건은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변덕장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때 작은아버지 규암공을 따 회령 지포의 적을 방어했으며 남포에서는 육박전을 벌여 적 수십급을 베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으며 갑자년 이괄의 변때 기공을 수립하여 진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규암 변홍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변덕일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무오년 심하에서 김응하를 따라 근무할 때 며칠을 힘껏 싸우다가 오랑캐에게 포위된 바가 되어 김공과 함께 동시 순절했다. 족질로는 변공의가 있었는데 훈련판관으로 임진왜란 때 의장 최경장을 따라 많은 공훈을 세우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이는 변씨 십삼 충훈을 일컫는 바라. 아! 목능 용사지란에 우리 나라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충성된 마음을 품고 의리로 적을 힘껏 토벌하고 베었던 바가 있으니 변문의 충렬지사가 이와 같음이 있었다.때를 응해 아울러 나아가 종묘사직의 생령에 공이 있었음이여 이는 하늘이 큰 어지러움을 내림에는 반드시 이를 소탕할 인물도 내림이라 초계 변씨는 충으로서 공훈으로써 모든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명성이 천추에 빛날 것이다. 진실로 유허지에 일편석이 없음이 후인이 효를 생각함에 황폐화됨을 참지 못함이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후손 변상호와 그 일족 변익수가 옥돌을 다듬었다. 변익수는 그의 아버지 죽암공 변광용의 뜻을 이어 거금을 전담하고 마을 입구에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문장으로서 부탁하자 사양하기를 누차 했으나 마침내 거절하지 못하고 공경히 비문을 지어 명하기를
사자산의 가파르고 깊은데
특별히 동촌에 사시니
빛나구나 충과 훈업
십삼 충훈 한 집안이여
아버지도 그랬고 아들도 그랬으며
형도 그랬으며 아우도 그랬구나
작은아버지도 그랬으며
조카들도 그랬으니
의리와 담략이 하나의 체를 이루었네
임진왜란은
국가의 초유의 사태로
강적들이 창궐하여
온 국토가 유린되었는데
그 지혜와 힘을 다하였고
그 활은 강하였네
혹은 권율 장군을 따르고
혹은 이순신 장군을 도왔구나
더러움을 일거에 씻어내니
우라 나라 다시 신성해졌는데
황폐화된 유적을 찾은 후손들
누군들 탄식이 없겠는가
빗돌이 높이 솟았으니
다시는 마멸되지 말게 하세
이에 의로운 행적을 서술함이니
수 많은 사람들 와서 밝게 드러남을 보시게나
단기 사천이백구십구년 병오년(1966년) 단오절 광산 이문수 삼가 찬하고 아울러 글을 쓴다.
전면은 밀양 손재형이 씀 1968년 3월 세움
<원문>
草溪卞氏十三忠勳遺墟碑
夫而大陸之廣而地靈所聚人物所興其有克世趾徽以顯其鄕里者且無多焉在左海褊壤南端之區一家一里而十三忠勳蔚然而起者其非炳然一氣貫宇宙而不渝者乎湖之長興府治東十里許有庄曰東村是卞氏之遺墟也草溪氏以高麗侍中文烈公庭實爲上祖歷七世門下評理贇麗運訖與鄭圃隱諸賢守罔僕義生侍郞南龍號靜庵入國朝漢城判尹三傳溫長興府使贈吏曹參判事師趙靜庵始入居此里焉生僉使孝忠生義禁府都事喜孫生水使國衡有子曰弘源號月溪氣質魁偉博通經史有雄圖智略當壬辰亂率義旅赴權元帥累立奇功丁酉與弟兄叔姪又赴李忠武奮身力戰未幾李公被誣拿去不勝痛寃尋聞忠武之
宥還往迎會寧浦李公執公手獎之曰念國亂而不顧身公曰死於死丈夫之常事轉戰鳴梁賊勢熾烈公與金應誠安衛諸將突入奮戰大捷戰功繼聞敵侵境內之報大驚曰長興吾父母之鄕不可緩也與諸兄弟率精兵直向芷浦鏖戰竟中丸卒于陣忠武公痛惜啓聞贈通政有弟曰弘濟訓練判事與兄同殉于芷浦有季弟曰弘洲號松川志氣淵黙勇力超倫初赴權元帥屢捷于嶺湖地方聞父兄之戰歿不勝奮激從李忠武協贊戎武李公之被誣也慨然涕流及李公復任與諸兄弟及義士白振南文英凱馬河秀丁鳴說金聲遠等三百餘人修戰船
十餘隻運入會寧浦忠武公陣忠武公大喜如此板蕩致
身盡力孰不感忠肝之壯公乃列船近洋軍勢大振連有勝捷聞兄與諸從之繼沒嘆曰獨保殘命將何爲哉力戰于鳴梁露梁等地南海雲臺之役弓矢告罄而殉啓聞贈兵曹參議命禮葬錄宣武原從勳享于錦山忠莊祠有子曰德璜承襲家學爲國忠節有乃父風從父戰于鳴梁露梁海連勝連捷進
戰南海雲臺諸父兄連死公號天痛哭曰未報君父之讐獨生何爲激戰至郭山竟遇害贈水使月溪之從父曰國幹氣宇宏偉膽略神異十七登武科歷七道兵水使莅官皆有治積中宗朝邊夷之侵無歲無之公爲禦捍多樹勳勞晩年再赴全羅右水使卒于營中朝遣致祭命葬有子曰弘建體幹魁傑官僉使丁酉與二弟及白振南義士等協助于會寧忠武公陣爲賊包圍幷二弟同殉有仲弟曰弘達號葵庵聰明絶倫力能用鐴爲簇
從父討邊夷見父圍突擊解父圍虜敗走自此邊憂永熄中宗執公手曰保生靈安社稷眞是干城之
材褒賜向日葵花特拜鍾城使壬亂大駕西狩公嘆曰君父蒙塵安可坐視乎倡義旅赴體察使李元翼幕李公壯其膽略爲前鋒與權元帥聲勢相依而捷攻丁酉再侵公以官軍前鋒往忠武公幕歃血以誓靖難向會寧津遏芷浦賊侵追擊南浦連日血戰爲賊圍勢甚危公勵氣策馬脫圍而斬殺無數賊將相驚嘆曰黑面飛將進戰唐浦諸昆季十餘人同殉錄宣武原從二等勳贈北兵使有叔弟曰弘迪勇力義氣超倫無儔丁酉亂與兄弘建募旅擊賊見兄被圍謂弟弘選曰兄入死地弟豈獨生乎與弟直躍入翼兄爭死賊義而解送旋慮後患曰勇力絶等豈非黑面飛將之兄弟乎幷害兄弟三人有季弟曰弘選司僕侍正膂力膽略俱絶倫丁酉與諸兄及義士整備舟帥馳見忠武公于會寧浦忠武獎許其忠義公布陣近洋軍勢相振連有勝捷至於唐浦矢窮援絶與諸弟殉于陣有從弟曰弘亮號桐溪早習武藝壬辰率義旅
進于長水防錦山茂朱賊轉向嶺南擊退星州開寧賊丁酉與文英凱丁鳴說追擊鳴梁賊聞閑山失守引兵忠武李公公獎許干城之材與賊數千戰于芷浦中飛丸而不挫縳裹傷處督戰終死軍中贈兵曹參判享錦山祠僉使有子曰德章登武科壬辰從仲父葵庵公防會寧芷浦之賊搏戰於南浦斬賊數十級錄宣武原從勳甲子适變亦樹奇功錄振武原從勳葵庵之有子曰德馹登武科戊午深河之役從金應河累日力戰爲虜所圍與金公同殉有族姪曰公毅訓練判官壬辰從繼義將崔慶長多立戰功錄宣武原從勳此所謂卞氏十三忠勳也嗚呼穆陵龍蛇之亂吾邦夫有之大役而懷忠奮義戮力討賊有如卞門忠烈之士應時幷出有功於宗社生靈者歟此天降大亂必有弛亂之人也草溪家聲以忠以勳膾炙萬口炳輝千秋固無待於遺墟一片石矣然不忍荒廢由於後人之孝思亦可已也哉後孫相浩與其族益洙
謀治貞珉益洙甫承其考竹庵公光鎔遺意專擔巨貲將鎭于里門請余爲辭以章之辭之屢而卒不獲敬爲之銘曰
獅嶽嶙峋 特開東村 赫赫忠勳 十三一門 有父有子 曰兄曰弟 是叔是姪
義膽一體 龍蛇之亂 國朝初有 强賊猖獗 八域躙蹂 竭其智力 强其弓弩
或從元帥 或佐忠武 掃蕩氛穢 重奠邦家 裔遷墟荒 孰不興嗟 有石屹然
托以不泐 爰述懿績 昭示來百
檀紀四千二百九十九年丙午端午節光山李玟秀謹撰幷書 前面密陽孫在馨書
戊申年 三月 日 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