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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국간 선정비(水使 卞國幹 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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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 진남관 경내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변국간

창 건 연 도 : 1588년

사 액 연 도 : 1935년

향 사 일:

 

iq02.png 선정비

여수 지역에 남아 있는 임진왜란 이전에 세운 유일한 선정비로, 전라좌수사(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한 변국간(卞國幹)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588년(선조 21) 세웠다. 비석 앞면 중앙에 수사 변공국간 선정비(水使卞公國幹善政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만력 십육년 유월일(萬曆十六年六月日)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1588년 6월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게 장식된 지붕돌을 갖춘 형태로, 심하게 마모된 상태이다. 조선시대 객사 건물인 여수 진남관(鎭南館, 국보 제304호) 경내에 다른 비석 14기와 함께 비석군(群)을 이루고 있다.

 

iq02.png 변국간 행장

<번역문>

병사공 행장 신정희 찬

공의 휘는 국간이며 자는 위경 변씨이며 본관는 초계이다. 시조는 변정실이며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팔계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열이다. 변빈은 정몽주 선생과 성리지학을 강의하며 토론했으며 세상에 추천된 바 중망받았다. 변남룡은 호가 정암이며 고려시대 문과로 합격하여 관은 한림원 문하시랑에 이르렀으며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이 한성판윤을 제수했으나 고사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는데 국간의 칠대조이다. 변효경은 문과에 합격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고조는 변옥이며 충순위였고 증조는 변온이었으며 동복현감을 역임했으며 조부는 효충으로 첨사을 역임했으며 졸후 참의에 제수되었고 아버지는 희손으로 도사를 역임하고 졸후 참의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공산 이씨로 판서 자번의 딸이며 숙덕이 있었다.

 

변국간은 가정 정해년(1527년)에 장흥군 안양면 동촌에서 태어났다. 공의 자태는 체격이 장대하고 훌륭했다. 타고난 기질은 강직하고 밝았으며 경서와 역사책을 읽어 두루 통했다. 부모님을 섬기는데는 뜻과 몸을 동시에 돌보았으며, 가정을 다스리는 데는 내외가 모두 화목하였으며, 사람들을 접함에 있어서는 겉과 속이 진실했으며, 일을 대함에 있어서는 그릇됨과 바름을 바르게 판명하여 여러 벗들이 모두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일찍이 삼략을 읽고 말하길 남자가 세상에 남에 평시를 만나면 글로써 임금을 보필함이 있어야하고 난세를 만나는 즉 무기를 가지고 준비함으로써 어지러움을 구함이 이것이 당연한 행동으로 이치에 맞다. 그런데 어찌 서생으로 산림에서 평생을 늙겠는가? 하였다.

 

명종 조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북병사로 있을 때에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여러 번 침입하였다. 공과 그의 아들 변홍달이 적을 막아 크게 승리하여 매 번 공을 세웠다. 변방에서 큰 공을 세워 칠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다다른 곳마다 추사비가 세워졌다. 선조 조에 전라 병사가 되었으며 임소에서 졸하였는데 육십오 세였다.

 

부고를 듣고 임금이 장례 용품을 내리고 장흥 안양면 이산 묘원에 예장하였다. 전하는 말씀은 장례한 이산 일양토는 나의 충신 변국간의 사패지다. 말씀하시길 이산 일면을 공에게 할양하라.변공의 빛나고 빛나는 마음은 보배롭게 기록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 부인은 숙부인 익산 소씨 소경의 딸이며 계비는 영월 엄씨 참봉 엄약동의 딸이다. 부녀자의 규범을 갖추고 있었다.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변홍건, 변홍달, 변홍적, 변홍선이며 홍건의 아들은 홍일의 아들은 변덕일이다. 그 외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의 조리와 행실 문장이 번거롭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데 이는 공이 자신을 잃고 나라를 섬김에 지금 나라 사람들이 흠앙하는 바와 같으니, 역사에 기록되어 민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공이 당시 교유했던 사람은 송호 백진남 해은 문영개와 김성원 등이었다. 아울러 시와 만장이 있었고 공이 남긴 문집에는 의로운 행적들이 기록되었는데 육정신이 꺼려하여 남아있지 않음이 애석하다.

 

공의 후손 변균민이 가장을 안고서 나에게 불후문을 청하는데 나는 비록 글이 없으나 변국간을 흠모해 온 지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주제넘게 사양하지 못하고 찬하는데 차례는 오른쪽과 같다.

 

兵使公 行狀 申正熙 撰

公諱國幹字偉卿氏卞系出草溪始祖庭實高麗門下侍中封八溪君諡文烈再傳曰贇與鄭圃隱先生講論性理之學爲世所推重有曰南龍號靜庵麗朝登文科官翰林止門下侍郞入李朝太祖拜漢城判尹固辭罔僕於公七世也有諱孝敬文參判高祖諱玉官忠順衛曾祖諱溫同福縣監祖諱孝忠僉使贈參議考諱喜孫都事贈參議妃貞夫人公山李氏判書自蕃女有淑德嘉靖丁亥生公于長興郡安良面東村第公儀形魁偉性氣剛明讀經史無不通解事親也志體兩兼齊家也內外擁睦接人也表裏眞實應事也邪正明辨儕友多憚之嘗讀三略書曰男子於世遇平時則以文有黼黻王家而遭亂世則用武備以濟艱此其當行底事奚獨以書生終老于林下耶明廟朝登虎榜受北兵使時北虜數侵邊於公與子弘達禦敵大捷屢立邊功以勳歷歇七道兵馬節度使所莅有追思碑宣廟朝以全羅兵使終于任所行年六十五訃聞上賜庀葬制禮葬于長興安良面梨山枕卯原敎曰梨山一壤土葬我忠臣卞國幹賜牌曰梨山一面割與公卞公煌煌寶筆百世無墜配叔夫人益山蘇氏瓊女繼配寧越嚴氏參奉若東女俱有閨範育四男曰弘建弘達弘迪弘選長房男德章次房男德馹與不盡錄嗚乎公之操履與文章無敢仰煩而至若忘身勤事尙今國人之所欽仰史筆之所不泯者也公之當時交游松湖白公振南海隱文公英凱金公聲遠也幷有詩挽公之遺文懿蹟中因六丁灰燼無餘惜矣及公之後孫均珉抱家狀以不朽文請余余雖無文景慕公久矣不敢辭冑越撰次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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