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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복 효자정려(卞景福 孝子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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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충북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

문화재 지정

배 향 인 물 : 변경복(14세)

창 건 연 도

중 건 연도

향 사 일

 

iq02.png 연 혁

卞景福(변경복)은 1593년(선조26)임진왜란 때, 그의 노모를 업고 피난하여 화를 면하였고,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 삼년간 묘를 지켰고, 한결같이 家禮(가례)에 의하여 제향하였다. 宣祖(선조)때에 효행이 알려져 정려되었고,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기의 효자(孝子). 본관 초계. 자 중신(中申). 호 백음(栢陰). 청주 출생.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는 홀어머니를 생전에 잘 봉양함은 물론 사후에는 시묘(侍墓)와 제사를 드림에 있어 지극한 예를 갖춤으로써 그 효성이 조정에 알려지고 그 향리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청주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변경복의 묘표문

<번역>

효자 백음 변공 묘표 청주 북 삼십 리에 있는 비홍리는 독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니 변경복이 살았던 곳인데 뒤에 효자각이 세워졌다. 지나가는 사람은 이를 표하여 묻지 않고도 변 공의 정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은 9세에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 거처했는데 모부인이 그의 파리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고기를 먹기를 권했다. 공은 엎드려 울면서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곧 삼밭에 숨어서 종일 나오지 않았다. 모부인이 크게 통곡하고 공을 안고 돌아왔다. 모부인 섬기기에는 항상 안색을 판단하여 모셨으며 아침에는 삶고 익힌 음식을 진상하기를 바랐으며 종에게 이 일을 시키지 않았다.

 

임진 왜란에 공은 오십오 세였는데 스스로 모부인을 업고 피란하였는데 강혁의 효와 같다고 보는 자마다 감탄했다. 모부인이 졸하자 몹시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며 하루에 세 번 상식을 올렸으며 우부 후에 곡함을 무상시로 하였다. 미죽으로서 상을 마쳤다. 이 때에 마을에 누차 돌림병이 있었는데도 공은 온전히 시묘의 움집에 있었는데 끝내 병에 걸리지 않았다. 궤전으로 받들음으로써 사람들이 변경복의 효에 감복받았다. 상이 끝난 후에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히려 새벽에 묘문지내에 아뢰었다. 매 기일 10일 전에는 손님들을 맞지 않았으며 슬퍼함이 초종시와 같았는데 혹 얼굴에는 눈물 흔적이 있었는데 곧 집안 사람들은 공이 꿈에 부모님을 보았음을 알았다. 향인들이 그의 빛나는효성된 행동을 드러내고 조정에서 이를 알고 드디어 정려각을 내리는 명을 내렸다.

 

사람들 모두가 다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92세에 돌아가시는데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길 이 생애에 헛되이 태어나 외롭게 100년을 살았으니 심히 부끄럽구나 또 시를 지어 뜻을 보이니 우도 안빈등의 말이 있다. 공을 보내는 향인들은 크게 슬퍼하며 또한 며칠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청주 주왕산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전의 이씨이며 먼저 돌아가셔서 옆에 합사하였다. 옛날에 구양자가 일찍이 주요경 묘에 표하여 말했는데 예를 잃음이 오래되었다. 상에 있는 자는 오직 벼슬길에 오르고 시집 장가가는 것을 하지 말라. 이는 특별히 법령으로 금한다. 그 곡읍지절과 거처의 질서와 음식의 변화가 모두 예가 있음을 알지 못함이다. 고로 나는 주군에 있는 바를 취하였다. 공으로 하여금 구양자를 만나도록 하여 그것에 두 양주군이 있음인가? 공은 팔계인이며 자는 중신이다. 상조는 변광이며 문하시중을 지냈다.

 

고조는 효문이며 본조에 예문 직제학을 지냈으며 증조는 변심이며 현감이었으며 할아버지는 변승종으로 참봉이었으며 아버지는 충남이며 판결사를 증직받았으며 어머니는 파평 윤선좌의 딸이었다. 변효문 이후로 직산에 살게 되었으며 모두 이 땅에 장사지냈다. 그 집이 비홍이 된 것은 공이 처음이다. 이씨 부인은 그 시어머니를 삼십년 봉양했는데 말과 안색을 잃지 않았으며 자녀교육에 도가 있었다. 아들은 변유인인데 행의에 알려짐이 있었으며 두 딸은 김대양 유옥에게 출가했으며 손자는 변시망은 좌랑 변시익은 문과승지 변시석은 통덕랑. 좌랑의 두아들로 변황은 문과지평, 변양은 유학의 덕이 있으며 시익의 아들은 변박으로 참봉이고 통덕랑의 아들 셋은 변숙 변확 변급이다. 내외 증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비홍에 만년에 작은 집을 짖고 연꽃과 국화를 그곳에 둘러 심고 날마다 경서를 대하고 늙도록 변함없었으니 어찌 마음에서 응결됨이 사라지겠는가? 벼슬길을 따르는 여러 후손들에게 경계하며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공을 받들며 맑게 조심하게 몸을 단속하니 오직 공의 행동에 은혜를 입어 정려가 있으니 이에 이곳에 간직해두었나니 후인들은 움직이지 말지어다.

 

<원문> 孝子柏陰卞公墓表

飛鴻里在淸州治北三十里有篤行之人卞景福居之後有棹楔立焉過者式之不問可知爲卞公旌也公九歲而孤能自居戚母夫人愍其羸弱誘使之肉公俯伏涕泣強之不已則遂投匿麻中終日不出母夫人大哭抱持而歸及事母夫人日常辨色而朝敬進所欲而烹飪不任婢使壬辰倭變公年五十五自負逃難如江革之爲見者感歎母夫人卒其執喪徑情寧戚日三上食虞祔後哭猶無時糜粥以終喪時閭里屢大疫公渾舍終得無恙以奉饋奠人以爲孝感喪除始歸其家猶晨謁于廟門之內每忌日前一旬不見客號絶如初終時或面有淚迹則家人必知其夢見父母也鄕人擧其焯焯者以聞於朝遂蒙旌命人人皆曰信年九十二將歿語家人曰虛生此世孤負百年甚可愧也又作詩以見志有憂道安貧等語鄕人送葬者殆傾邑亦有累日不肉者葬在淸州住旺山配全義李氏先歿而祔焉昔歐陽子嘗表周堯卿墓曰禮之失久矣居喪者惟仕宦婚嫁不爲此特法令之所禁爾其哭泣之節居處之別飮食之變皆莫知其有禮故吾於周君有所取也使公得遇歐陽子其有兩周君乎

 

公八溪人字仲申上祖光高麗侍中高祖孝文本朝藝文提學曾祖鐔縣監祖承宗參奉考忠男贈判決事妣坡平尹宣佐女自提學以下世居稷山皆葬其地其家飛鴻自公始李氏奉養其姑三十年言色未嘗失敎子女有道男惟寅以行義聞二女適金大洋柳沃孫時望佐郞時益文科承旨時奭通德郞柳沃男正立佐郞二子㨪文科持平揚業儒承旨一男摶參奉通德郞三男㩋擴扱內外曾玄不能盡錄公於飛鴻晩築小齋荷菊環之日對經書至老猶然豈泯然有會于心者耶見諸孫從宦戒之曰誠心奉公淸謹律身無忝祖先其子孫之賢也宜哉銘曰惟公之行恩有旌典玆惟其藏後人毋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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